작별과 작별하는 법, <아만자>

'아만자'
이 말이 가진 뜻은 무엇일까. 언뜻 들으면 영어로 된 이름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곳의 섬 이름 같기도 하다. 아만자, 아만자, 아만자. 계속 이 단어를 말해보면 답을 알 수도 있다. 떠오르는 단어 하나가 있지 않나?
아만자. 바로 암 환자. 주인공은 휴대폰을 하다 질문을 하고 답하는 사이트에 들어가 질문을 하나 보게 된다. 한 사람은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나는 아만자야! 아만자라구!”하면서 운다며 아만자의 뜻을 묻는다. 답변은 이렇게 달린다. 아만자는 암 환자를 잘 못 들은 것이라고. 주인공은 엄마에게 아만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엄마는 웃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인공에게 있다. 주인공은, 아만자다.
암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다. 택배가 오는 것처럼 미리 언제 온다고 문자를 보내 알려준 뒤 초인종을 눌러주는 것이 아니니까. 애초에 주문을 한 적도 없으니 암이 갑작스럽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인공은 허리가 아파 병원을 찾았고, 위암 말기라는 결과를 알게 된다. 허리가 아픈 것도 척추로도 전이가 돼서 그렇다고. 주인공은 덤덤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지만, 식사 자리에서 두려움을 나타낸다. 울면서도 가족들에게 오늘은 그냥 밥을 먹자고 말한다. 자신은 이렇게 밥을 먹을 날이 많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너무 평범하게 다가오는 저녁 식사 자리.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겠지만, 이렇게 당연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주인공은 기적을 바란다. 기적이라는 것이 있을까. 아니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또다시 기적이 있어 자신에게도 찾아오면 좋겠다고, 위암 말기라도 다시금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기적을 바랄 것이다. 꼭 아프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복권에 당첨되기를 바라며 기적을 찾을 수도 있고, 입시를 성공적으로 끝내기를 기도하며 기적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내일이 오기를 바라며 기적을 찾는다. 내일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렇게 내일을 바라며 기적을 찾던 주인공이 자신에게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잠시라도 좋으니 전원을 꺼버리고 싶다며 말이다. 살고 싶다면서 전원을 꺼버리고 싶다는 건 또 무엇일까. 무엇이 기적을 바라던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모든 것은 다 통증 때문이다. 아만자가 아닌, 그것과 비슷한 것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통증이 주인공을 괴롭힌다.
주인공은 스스로에 대해 생각을 한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젊은 나이에 위암이라는 먼 이야기 때문에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잊어가기 시작한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여행도 가고, 여러 가지를 해볼걸.’ 하는 후회뿐이고 사람들은 자신 앞에서 울거나 슬픔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나를 모르겠다고 해서 결코 나를 포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몸 구석구석 무너져간다고 해도 주인공은 앞으로 걸어 나간다.
주인공은 암을 축구 경기로 표현한다. 자신은 계속해서 싸우고 있지만 결국은 지고 말 것이라고 말이다. 유명한 축구 선수들이 포기하라고 주인공을 두드리는 장면이 아리게 다가온다. 이렇게 능력 많은 사람이 보아도 포기하라고 말할 정도면, 이 경기는 해봤자 질 게임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분명 초반에서 기적을 바라고 있던 주인공이 그저 덜 아프게 죽을 수 있는 것으로 기적의 의미를 바꿔나간다. 그 누가 주인공 앞에서 변했다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주인공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결이다. ‘나에게도 내일이 올까?’라든가, ‘오늘 아침이 나에게 찾아와서 정말 감사해.’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사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들까.’, ‘그냥 눈을 감고 나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불평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물론, 아만자가 아니더라도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 모두는 각자 남은 알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몸이 아픈 병만이 병을 의미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가서 ‘너는 몸이 건강하니 얼마나 행복하니! 네가 살고 싶지 않아 하는 내일이 누구에게는 정말 필요한 하루일 수도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모로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다시금 내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고 다독였다. 오늘이 고되고, 때로는 살아가면서 관계들에서 생긴 생채기 때문에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을 때도 있다. 내일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내일이 올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 주인공과 다른 내용이었지만 기적을 바라던 나는 어쩌면 주인공처럼 내일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살아가는 것이, 그 속에서 받았던 상처들이 너무나 커 마음에도 없는 말로 내일을 버리려고 했던 것일 뿐.
주인공은 암에 관련된 카페에 가입해 읽었던 글들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암 환자들과 암 환자들의 가족들이있는 인터넷 카페에서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고. 아만자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묶어서 담아내기에 그들은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 기적을 바란다.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말하기에는 너무나 알록달록한 기적들. 우리는 내일을 바라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내일이 올 것이다. 당연히 주인공에게도, 주인공이 만난 아만자들에게도 내일이 올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작별'이라는 이름과 작별하는 방법을 배워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