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가 추천하는 이주의 '웹툰 속 어떤 순간’] 어쿠스틱 라이프 -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
저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 사실 페미니스트의 정확한 의미(사전적 의미는 알지만)에 대해서조차 아직도 아리송해요. 칼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한 친구는 "왜 제목에 '여기자'라는 단어를 쓰니?"라고 질문했습니다. 성별이 여자고, 직업이 기자라서, 무심코 '여기자'라고 썼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성차별적인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더군요. 하지만 저는 '여기자'라는 단어가 주는 미묘한 느낌이 좋으므로 그냥 쓰겠습니다. 이렇듯 저는 좀 둔한 사람입니다. 인상이 날카로운 편이라 사람도 그런 줄 알지만 사실 일상의 행복을 유지해나가는 것 이외에 별 관심이 없어요. ‘일베’는 싫지만 ‘메갈리아’도 불편해요. 그리고 적지 않은 분들이 저의 이런 미지근한 노선에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이번 주 잔잔하던 저의 일상에 누가 돌멩이를 던져 파문을 냈습니다. 그 주인공은 꽤 오랜 기간 친애하던,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 인생선배였습니다.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주고받다가 저는 새해에 진행할 여행에 대해 농담을 곁들여 이야기했습니다. 만일 돌아오지 않으면 그 나라 남자 꼬셔서 눌러 앉은 줄 알라는 그 흔한 농담이요. 그런데 갑자기, 너무나 생뚱맞게 그는 '성매매는 하지 마, 잡혀가니까'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핫한 카페에서 한 손엔 핸드폰을 다른 한 손엔 포크를 들고 밀크 크레이프 케이크를 먹던 저는 순간 굳어버렸습니다. 불쾌하다는 메시지를 보냈으나 그는 사과하지 않았고 농담을 계속 이어나가려 했습니다. 그 뒤 어떤 액션을 취했는지 자세히 적지는 않을게요. 다만 저는 다시금 분명하게 그 발언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과를 요구했으며 그 다음에는 재즈댄스 수업을 들으러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웹툰 '어쿠스틱 라이프'의 한 에피소드를 읽었죠.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연재 중인 작가 '난다'의 <어쿠스틱 라이프>는 생활 웹툰의 지존으로 불리는 작품이지요. 오랜 시간 우리는 그녀의 만화를 보며 ‘난다’와 그녀의 남편인 ‘한 군’, 그리고 그들의 사랑스러운 딸 ‘쌀이’가 그려내는 일상을 지켜봤습니다. 작가로서 난다의 장점은, 모두가 경험한 바 있지만 특정한 단어로 표현하는 법을 몰라 침묵하는 일상의 어떤 순간들을 정확하게 포착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복잡한 심경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제게 어쿠스틱 라이프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웹툰 리뷰]어쿠스틱 라이프 - 난다 [웹툰 리뷰]어쿠스틱 라이프 - 난다](https://conist-cdn.com/2d/ff/a245139993462be71ce43a22b551.jpg)
해당 에피소드의 내용은 이래요. 엄마 난다는 딸 쌀이와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술 취한 남자와 소녀가 (아마도 부녀겠지요) 난다 모녀가 앉은 자리 앞에 섰습니다. 다소 산만한(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 쌀이를 보며 남자는 '얌전하지 않다'며 다른 아이와 대놓고 비교하고, 쌀이가 들고 있던 수세미를 빼앗는 등 무례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엄마 난다는 그 상황을 딱히 저지하지 못하고 지하철에서 내리고 맙니다. 그리고 이후 오랫동안 후회하죠. 어린 쌀이조차 '아저씨, 미워'라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는데, 정작 엄마인 자신은 눈치만 보느라 아이의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합니다.
![[웹툰 리뷰]어쿠스틱 라이프 - 난다 [웹툰 리뷰]어쿠스틱 라이프 - 난다](https://conist-cdn.com/94/df/f27499d04a7fe27773a4eb6d24e0.jpg)
괴로워하던 난다는 문득 어린 시절 엄마와의 에피소드를 떠올립니다. 늘 말수 없이 조용하고 차분했던 난다의 엄마는, 딸이 옆집 아주머니에게 맞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단박에 달려가 아주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에 어린 난다는 놀랐지만 동시에 기뻤습니다. 어린 난다는 흐트러진 엄마의 모습을 보며 ‘가족을 지켜내기 위한 파이터의 위엄’을 느꼈다고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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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난다는 '건강한 공격성'이라는 단어를 다시 곱씹습니다. '건강한 공격성'이란 누군가 나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이에 대해 반격하는 것입니다. 타인과 나 사이의 힘의 균형을 이룰 정도의, 자신을 지켜내는 당당함을 말하죠. 난다는 다짐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한 여성성에 얽매이지 말고, 공격성이라는 선택지를 받아들이자고요. 불쾌한 농담에 정색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울지 피할지 방식을 스스로 정하고, 내 잘못을 찾으려 애쓰지 말자고 말이죠.
네, 솔직히 말하자면 만화를 보기 전까지는 1g 정도의 후회가 있었습니다. 별 일 아닌데 너무 예민했나? 전문성과 사회적 위치를 지닌 인맥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은 아닐까? (교양이라는 단어는 차마 못 쓰겠군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호하고 빠르게 대처한 저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어졌습니다. 여담이지만 아직 사과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늘 사회정의와 여성평등을 외치던 분이기에 씁쓸하긴 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가'이니까요. 사과를 하고 말고는 상대방의 인격에 따른 선택이며, 저의 존엄성과는 관계없는 문제지요.
지난 회에 다룬 '소녀'가 만든 사회적 여파 때문일까요? 최근 '역시 여자는~'이라는 어구를 서두에 달고 말하는 분들이 여기저기 생겨났다고 들었어요. 그런 분들이 저를 보면 피하셔야 할 거예요. 곰처럼 둔했던 저는 지금 '건강한 공격성'을 지닌 한 마리 날쌘 맹수와도 같으니까요, 어흥!
필진 소개
직업은 기자.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날의 웹툰 챙겨보기. 주말 일정은 늘 신사동의 한 만화카페에 칩거하기.
인터뷰 때 늘 하는 질문, ‘혹시 웹툰 보세요?’ 놀라운 사실은 각양각색의 수많은 인터뷰이 중 웹툰을 보지 않는 이는 1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하여 오늘도 진지하게 외치는 바, 웹툰은 우리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