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둘리가 살던 동네에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한국콘텐츠진흥원 | 2020-09-23 14:00

둘리가 살던 동네에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둘리가 살던 곳이 제가 살던 곳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한 가정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도 있는 덜덜거리는 선풍기가 고길동 씨의 안방에도 있었고, 저도 쓰는 칫솔을 둘리도 썼죠.

글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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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공룡 둘리>
(글 그림 김수정 월간 보물섬 연재) 
아기공룡 둘리는 쌍문동에서 1980년대를 
살았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 
택이, 선우, 정봉이가 살았던 그 동네 말이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씩 <보물섬>이란 만화잡지를 사오곤 하셨습니다. 두툼한 그 잡지를 받아들 때면 신이 났죠. 너무 어릴 때였기 때문에 그때 본 모든 만화가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제 취향이 아닌 만화들은 아예 건너뛰고 좋아하는 몇 작품만 쏙쏙 골라서 보기도 했고요.

빼놓지 않고 챙겨본 것 중 하나는 <아기공룡 둘리>였습니다. TV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버전도 좋아했죠. 주제가를 부르는 것도 즐겼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열창할 때면 ‘1억 년 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우리 함께 떠나자! 아아, 아아!’란 대목에선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애절한 마음을 살리려고, 요즘 말로 ‘쏘울’을 담아보기도 했답니다.

그때도 지금도 저는 둘리와 친구들이 고길동 씨네 호빵을 다 먹어버리곤, 비눗방울을 호빵으로 둔갑시켜 접시 위에 소복하게 올려놓던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고길동 씨네 식구들이 빵을 집어 들면, 사실은 비눗방울인 가짜 빵이 뽁, 뽁, 뽁, 터지고 말았죠. 그 장면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무렵 호빵은 겨울
철에 즐기는 몇 안 되던 간식이었기에 우리 가족도 종종 사 먹곤 했는데요. 호빵을 먹을 때마다 ‘둘리가 만든 그 비눗방울 빵처럼 뽁, 뽁, 터지는 건 아닐까?’ 은근히 기대했던 기억이 납니다. 반대로 비눗방울을 날리는 놀이를 하면서도 ‘이게 다 호빵으로 변하면 좋겠다’란 상상을 했고요. 그리고 그 가짜 호빵들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열
심히 궁리하기도 했답니다. 이런저런 공상하기를 좋아하던 저에겐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죠.

어릴 적 저를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준 만화는 많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유형도 다양했죠. 우주를 누비며 악당들과 싸우는 변신 로봇이기도 했고, 지구를 노리는 외계인들과 싸우는 전사들이기도 했고, 끝내 얼굴은 공개하지 않은 채 늘 고양이 쓰다듬는 뒷모습만 보여주던 악당과 겨루는 형사이기도 했고, 요술봉을 휘두르며 주문을 외면 멋지게 변신하는 요정이기도 했죠. 온몸이 근육 덩어리인 힘센 장사도, 날개를 달고 어디든지 날아다니는 조그마한 생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만화보다 <아기공룡 둘리>에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것은 둘리가 살던 곳이 제가 살던 곳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한 가정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도 있는 덜덜거리는 선풍기가 고길동 씨의 안방에도 있었고, 저도 쓰는 칫솔을 둘리도 썼죠. 제가 먹는 그 라면을 둘리와 친구들이 노래까지 부르며 맛있게 먹었고, 제가 덮는 보통의 솜이불을 둘리도 덮었습니다. 제가 살던 곳은 서울의 평범한 동네였지만,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재미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안겨주었죠. ‘언젠가 한강에 빙하가 떠내려왔다는 뉴스가 나오면 꼭 가봐야지. 둘리 같은 생물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발견해서 구출하면 좋겠다’ 같은 생각을 하며 두근거릴 수 있던 것도, 누가 골목에 내다 버린 동강 난 기타를 보고 ‘도우너의 타임 코스모스 같은 건 아닐까? 집에 놓아두면 언젠가 작동해서 모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란 생각에 주워오며 설렐 수 있던 것도 모두 둘리 덕분입니다.

내년쯤 이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여기저기 집을 알아보던 중에 쌍문동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쪽 동네도 이사 후보지라고 하니 친구가 이유를 묻더군요. “둘리가 살던 동네에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아마 영 싱겁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이었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당장은 어렵게 되었지만,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쌍문동에 살아보고 싶습니다. 무려 ‘초능력’이란 게 있는데도 우주를 정복하는 세기의 악당이 되는 대신 호빵을 만드는 데 쓰던, 착한 둘리와 친구들이 살던 그 동네 말입니다.


도대체 |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뭐라고? 마감하느라 안 들렸어> 등의 책을 썼습니다.
현재 네이버 동물공감판에 만화 <태수는 도련님>을, 경향신문 토요판에 만화 <그럴수록 산책>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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