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녀가 훌훌 털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길, '27-10'

김미림 | 2019-06-30 14:41

'가족'이란 단어는 통상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는 단어이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돌아갈 수 있는건 가족의 품이며,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날 언제나 사랑해줄 존재 역시 가족이란 표현을 쓰기도 하는 걸 보면 가족이란 단어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생각 이상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반드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듯이 가족 역시 언제나 따뜻한 존재일 수는 없다.


특히 뉴스나 기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가정 내 범죄 사건을 보면 더욱 그렇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혈연, 혹은 법적으로 가족으로 묶인 누군가가 어느날 나에게 신체적,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가해자가 된다면 어떨까?

최근만 하더라도 자신의 친딸을 성폭행하고 임신시킨 부친의 사건을 비롯해 재혼한 남자가 자신의 친딸을 살해하는데 동조한 친모까지 이게 정말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싶은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며, 가족이란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른 후 쉬쉬하며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고 있는 경우는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는 특히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관계에 대해 절대적이고, 집착적인 특성을 가지는데 그 덕분인지 다른 사람의 가정사엔 참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부모로 인한 가정 내 아동폭행, 또는 부모나 친족에 의한 가정 내 성폭행 등이 자행되어도 쉽게 밝혀지지 않고, 또 설사 의심이 가더라도 가족끼리 알아서 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냥 넘어가고,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피해사실을 주변에 알리더라도 오히려 주변에서 강제적으로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용서를 강요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러한 2차 가해가 과연 옳은 것일까?



27-10




27-10


네이버웹툰에서 연재중인 작품 '27-10'은 가족 내 성폭행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쉽게 다룰 수 없는 무거운 소재이기 때문에 어떤 내용일지 읽기 전부터 걱정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소재의 무거움과 다르게 담담하고, 침착하다.

이 작품은 아주 평범한 순간을 그리며 시작한다.
고양이 두마리를 키우며 사는 '그녀'가 밥을 먹고, 고양이 밥을 주고 청소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가만히 앉아 말한다.
'두 번이나 쓰러졌는데 왜 안 죽을까.'



27-10


사실 그녀는 20대 젊은 나이에 뇌졸중으로 두번이나 쓰러진 적이 있는데, 그녀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죽음에 대해 이토록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녀가 신체의 병보다 더 큰 마음의 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껏 딱히 누구에게 티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오긴 했지만 언제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영원히 못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던 자신이 걸어온 이야기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27-10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 그 일이 시작된 건 초등학교 3학년, 10살때였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2차 성징이 시작되며 가슴에 멍울이 생기기 시작한 그녀에게 부친이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 뒤로 그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계속 그 일은 반복되었다.



27-10


그녀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는데, 특히 엄마가 그 사실을 알게 될까봐 그게 두려웠다.



27-10


어릴때부터 부친이 술을 먹고 수시로 행하던 폭력과 그녀에게 가해진 가혹한 일은 그녀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용기조차 낼 수 없게 만들었으며, 밖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한결같이 밝은 존재였지만 집에만 오면 어두운 방 구석에서 혼자 울음소리를 삼키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대견하게도 그녀는 가출도 하지 않고 자신을 포기하지도 않고 아무일도 없이 자란 아이들과 비슷하게 잘 자라줬는데, 자신의 재능을 찾아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그림을 그려 자신의 앞가림을 하는 잘 자란 어른이 되었다.



27-10


하지만 수시로 그녀를 덮쳐오는 스콜같은 우울함과 슬픔은 점점 자라났는데, 그녀의 마음 속에 피해를 입은 사건들보다 오히려 그로 인해 생긴 괴로운 감정이 그녀를 억누르고 있음을 그녀는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성폭행의 피해자들은 오히려 가해자보다 더 얼굴을 들기 어려워 하는데, 최근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러한 사건의 피해자가 된 여성들의 행동거지에 대해 지적하거나 옷차림에 대해 지적하며 그로 인해 범죄의 대상이 됐다고 말하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또한 법정에서도 성폭행 관련 범죄에 대해 형량이 국민정서에 비해 낮은 경우가 많아 사회적으로 공분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고3 입시가 마무리 될 즈음 드디어 처음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누군가에게 털어 놓는데, 여느날 처럼 혼자 울다 지쳐 있던 그녀는 친구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단지 친구에게 자신에게 생긴 일을 담담하게 털어 놓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조금 한발 앞으로 전진한 것이 아니었을까?


인간에겐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이 주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련의 크기는 누가 측정하는 것이며,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판단은 누가 하는 것일까?



27-10


세상엔 일어나선 안되는 일이지만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마냥 시련을 견뎌야만 하는 걸까?
이 작품은 주인공인 그녀가 겪은 시련을 자세하게 그리고 있진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극복해 내는지와 그녀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도 고통을 극복해 내는 노력과 용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다.


섣불리 다루기 어렵고 불편한 소재를 그리고 있는 '27-10'을 읽다 보면 그녀에게 누구나 손을 내밀고 싶어진다.
그녀가 너무 담담해 오히려 마음이 아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작품을 읽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을 것이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이다.
 


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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