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누구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의 이야기-웹툰 '우두커니'

조경숙 | 2019-04-01 14:38
"'아이 엄마와 만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배지를 만들어서 달고 다니고 싶어."

한 친구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눈물이 날 뻔했다. 친구는 모임 장소와 시간을 가능한 내 편의에 맞추어주고,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아이와 함께 만나게 되더라도 환영해주곤 했다. 남편의 정시 퇴근과 아이의 컨디션 등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져 '운 좋게' 만남을 성사한 날, 그간의 정황에 대해 내가 미안해하자 친구가 웃으며 저 말을 건넸다. '아이 엄마와 만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아이 때문에 변수가 생겨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돌봄 노동에는 중단도, 휴식도 없다. 회사는 급한 일이 생기면 연차라도 쓸 수 있지만, 돌봄노동에는 대체할 사람이 생기지 않는 한 휴식할 수 없다. 내 경우에 돌봄 노동은 주로 아이를 향해있지만, 돌봄이 꼭 아이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혼자 거동하기 어려운 장애인이나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돌봄 노동을 필요로 한다. 최근 다음에서 완결된 웹툰 <우두커니>는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모시는 딸 부부의 돌봄 노동을 그려내 많은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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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UM에서 최근 완결된 웹툰 <우두커니> 썸네일 (출처: DAUM)

웹툰 <우두커니>는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느린 분위기 속에 내용이 전개되지만, 이 안에서 아버지가 앓는 치매만큼은 빠르게 악화된다. 만화의 주된 화자는 딸인 승아다. 아버지의 치매를 의심할 만한 증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노화 증상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아 초기에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치매는 아버지 안에서 조금씩 자라나, 이제 아버지는 승아가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딸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아버지의 치매는 서서히 진행된다. 아버지는 승아를 의심하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화를 내기도 한다. 밤마다 아버지의 증세가 심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승아는 방에 들어와 숨죽여 눈물을 흘린다. "창밖으로 어둠이 깔리면, 아버지는 머릿속이 캄캄해지고 그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다. 그곳에는 별도 달도 없는 모양이다."(웹툰 <우두커니> 중)

그러나 아버지의 치매를 돌보는 시간이 늘 괴롭고 우울하기만 한 건 아니다. 승아와 영우는 아버지와 함께 정기적으로 밖에 나가 산책하고, 바깥 날씨가 궂을 때는 아버지에게 실내 자전거라도 탈 것을 권유한다. 주로 집안에서 요리하여 밥을 먹었지만,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외식을 하기도 한다. 치매는 승아 부부가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낯선 세계지만, 승아는 아버지에게 오랫동안 받아 왔던 사랑을 떠올리면서 아버지의 치매와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탐험마저 곧 깨져버린다. 아버지는 승아 부부를 향해 근거 없는 의심을 지속하고, 결국 승아는 아버지를 시설 요양원에 모시기로 결정한다. 웹툰 <우두커니>의 서사를 따라가다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발달장애가 있는 동생 혜정과 함께 사는 '생각많은 둘째언니' 장혜영이 책 《어른이 되면》에서 소개한 일화다. 동생 혜정이 행사장에서 노래하고 있는 가수의 무대에 올라갔을 때, 가수가 기꺼이 혜정과 춤을 추며 좌중의 분위기를 바꾸었다고 한다. 함께 춤을 춘다는 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우두커니>를 보자면, 내 일상이라는 무대에 갑작스럽게 뛰어 들어온 치매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함께 춤출 수 있으려면, 무대에 갑자기 나타난 치매에 맞추어 나를 변화시킴과 동시에 무엇보다 '춤출'수 있는 여유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함께 춤출 수 있는 여유를 당사자가 스스로, 혼자서 만들어내긴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노력해도, 승아 부부의 개인적인 노력만으론 부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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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어른이 되면》 표지 (출처: 우드스톡 출판사)

저출산 고령화 사회를 증명하는 수많은 숫자가 알려주듯, 우리 사회는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늙어가는 이들과 함께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런 사회에서 다가오는 노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때의 돌봄 노동은 누가 감당하게 될까. 확실한 건, 사회가 준비되었든 안되었든 내가 나를 돌볼 수 없는 때는 분명히 온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