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스타일리쉬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SF "그것들"

오지상 | 2016-08-21 11:16

 

 

 

문명이 멸망하고 질서가 사라진 세계는 어떨까. 일부 국소적인 지역에서 실제로 벌어진 현상이지만, 소설을 쓰고 만화를 그릴 만한 환경이 되는 나라에서는 여전히 낯선 상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창작가들의 호기심과 욕구를 자극하는 소재인 것 같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이름 아래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온건하고 체계적인 문명에서 살아가는 이가 비문명, 원시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 오랜만에, 제대로 된 ‘멸망, 그 이후’를 다루고 있는 웹툰이 있다. 제목은 ‘그것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단순하고 직관적인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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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멸망해있다. 혹은, 멸망한 것 같다. 적지 않은 분량을 보는 데도 그 과정이나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 그리 중요한 이유는 아니니까 상관없는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땅은 전부 사막이고, 물을 가진 이가 곧 권력자이며, 사람 같지 않은 존재들이 득시글거린다.

‘거대한 빛’이 사방에서 솟아나고, 하늘에서 누런 비가 내렸다. 비를 맞은 이들의 육체는 기괴하게 비틀렸고, 눈이 노랗게 물든다. 그들은 ‘노랭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그렇지 않은 ‘정상인’들에게 배척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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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과 ‘웬디’는 황무지 위에 세워진 추악한 도시를 거점으로 떠돌아다니는 방랑자들처럼 보이는데, 과거는 그리 특별한 게 없다. 직접 읽어보는 쪽이 제일 좋겠는데, 이야기의 초점이 굉장히 다양한 인물들에게 분산된 편이므로, 특정 인물에 대한 설명만 늘어놓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중년의 남성과 그가 거두어들인 (그리고 이제는 훌쩍 커버린)분홍머리의 입이 걸걸한 왈가닥 여자애가 1부의 주인공이라는 점만 알아두면 된다.

만화를 펼쳤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그림체다. 극화체처럼 사실적인 인체 묘사에 제한적인 채색, 회색빛의 세계, 그리고 거친 질감의 표현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흉터와 주름투성이의 피부와 기형적으로 비틀린 노랭이들의 인체는 그림체와 맞물려 멸망 이후의 세계라는 사실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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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제도가 무너진 공간을 대신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원시적인 폭력이다. ‘그것들’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폭력 묘사 또한 인상적인 부분이 많다. 멸망 후 도처에 널렸을 법한 총이 맹활약하는 싸움, 초월적인 능력이나 존재는 없다. 일부 노랭이들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육체능력을 지녔지만 다굴과 함정, 총기 앞에는 장사 없다. 평범한 인간들은 물론 총알 한 방에 무력해지며, 승패는 누가 먼저 선빵을 날리는지, 누가 영리하게 뒤통수를 갈기는지 여부에 달렸다.

액션 영화의 클리셰 같은 전개는 찾아볼 수 없다. 죽일 이유가 있으면, 아니, 살릴 이유가 없다면 무조건 죽인다. 머리가 반쯤 돌아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폭력을 망설이는 것은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입을 피해를 우려했을 때 뿐, 그러나 일단 시작되면 금기는 찾아볼 수 없다. 진정한 종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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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에 대한 설명은 아주 담백하다. 1회 내지는 2회 남짓한 중간 중간에 삽입된 단편으로 아주 일목요연하게 그들의 - 대체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 과거를 설명하고, 성격과 철학의 배경을 - 대체로 왜 이렇게 돌아버렸는지 - 알려준다. 사실 구구절절한 과거사보다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인물들의 개성은 말보다 행동인 것 같다.

열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확실한 법. 세계의 원칙 또한 단순하다. 내자불선 선자불래(來者不善 善者不來)! 그 원칙에 충실한 짐승 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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