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빙의 회귀 환생 로맨스 판타지'의 카운터 어택 - 웹툰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

조경숙 | 2020-05-29 14:51
요즈음 웹소설/웹툰계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단연 '빙의 회귀 환생 로맨스 판타지'다. 이 장르의 작품들에서는 어느 날 느닷없이 이세계(異世界)로 건너온 (주로 여성인) 주인공이 기존에 자신이 살던 세계와 새로운 세계 사이의 낙차에 적응해가며 나름의 기지를 발휘해 살아남는다.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 명칭을 하고 있지만, 이세계로 넘어간 주인공이 그저 사랑에만 빠지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의 경우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주인공들은 날카로운 통찰을 발휘해서 이세계의 질서를 파악하고, 이전의 생에서 쌓아왔던 능력치를 토대 삼아 자신만의 차별성을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예로 네이버 웹툰 <이계 무슨 황비>는 콜센터 상담원이었던 진새롬이 동양계 판타지 세계로 건너가 '황비'로 간택되는데, 본래 현실 세계에서 감정노동 종사자로 오랫동안 근무하며 다년간 쌓아 온 고객 응대와 문제 해결 능력으로 황제에서 읍소하기 위해 찾아온 자국민들의 민원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간다. 코미코에서 연재 중인 웹툰 <황후궁 체대생>는 체대생이었던 여성 신해설이 이세계의 황후로 빙의하면서, 체대생이었던 신체적 능력치를 발휘해 황후를 해하려는 자객들의 암살 모의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이들 웹툰은 단순히 새로운 세계에서 만난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 판타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전 생의 경험치를 십분 활용하여 새로운 세계에서도 지혜롭게 살아남는 일종의 생존극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에서도 웹툰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코미코 연재, 원작 재겸, 글 그림 새들)는 이전의 로맨스 판타지에서 볼 수 없던 독특한 소재로 눈길을 끈다. 대체로 주인공 캐릭터들이 황후, 황비, 공녀 등 최소한 귀족계급 이상으로 회귀/환생/빙의하는 여타 작품군에 비해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는 주인공이 애당초 평민 신분으로 환생하는 차이를 보인다. 주인공 유리는 한국의 중소기업에서 재단사로 혹독하게 노동하다 죽었는데, 사망 이후 17세기 서양이 연상되는 세계에서 환생한다. 환생한 세계에서 천은 평민들이 쉽게 사지 못할 정도로 비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싼 천을 이용해 만든 옷들은 값에 비해 형편없이 불편하다. 그래서 유리는 자신이 지난 생에서 축적해왔던 의복 지식을 이용해 싸고 질 좋은 보급형 의복을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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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 작품 썸네일 이미지 (이미지 출처: 코미코)


그런 유리가 대국 발렌시아의 여왕 쎄시아와 만나는 건 수년 후의 일이지만, 여왕 쎄시아가 유리를 찾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직접 전쟁터에 나서서 폭군을 물리치고 아흔아홉 개의 나라를 정벌해 대국 발렌시아를 건설한 쎄시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허리를 꽉 죄는 코르셋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혼자서 왕관을 벗을 수도 없고, 옷을 입을 수도 없는 데다, 옷을 입기 시작하면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기존의 왕국 드레스 대신 쎄시아는 편한 옷을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유리가 직접 발렌시아의 황궁으로 건너가 누구나 쉽고 간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제작하게 된다.

이 웹툰의 소재는 기본적으로 의복에 근거하고 있지만, 유리가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떠올린 건 반드시 의복뿐만이 아니다. 나이가 많은 남성들과 나이 어린 여성을 결혼시키는 조혼 풍습을 포함해 여성들을 얽매는 여러 사회적 코르셋에 대해서도 유리는 거리를 두고 관찰하며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실은 유리 자체도 상단에 머무르기 위해 남장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여성이 편한 옷을 입지 못하는 것 자체도 의복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기혼 여성이 편한 옷을 입으면 그 남편을 욕보이는 꼴이 되는 성차별적인 시대 문화에 기인한다. 그래서 유리에게도 제국의 여왕 쎄시아가 필요하다. 대륙의 가장 높은 여성인 쎄시아에게 편안한 옷을 입혀서, 모든 여성이 무겁고 불편한 코르셋과 파팅게일을 입지 않는 것이 유리의 목표이니까.

결국 유리가 싸우는 건 단지 구시대의 의복기술이 아니라 성차별적인 구시대의 가치관이다. 그러나 유리가 사는 세상에서 목도하는 어떤 사건들은 지금의 현대 사회에서도 흔히 일어나고 있다. 성에 의거해 다른 이를 희롱하고 폄하하는 모습들은 유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지금의 현대 사회가 다르지 않다.

갑자기 다른 세계로 떨어진 주인공이 서로 다른 세상의 낙차를 겪어나가는 걸 보는 것이 빙의/회귀/환생 판타지 장르의 매력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서사를 충실히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주인공이 목격한 세상의 공통점을 더 발견하게 된다. 이런 때에 이세계는 단지 차이를 느끼며 현대의 우월감을 느끼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다시금 자각하는 장치가 된다. 그게 바로 '빙의 환생 회귀 로맨스 판타지' 장르가, 그리고 웹툰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가 숨겨 둔 묵직한 카운터 어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