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곳에서 기다려>, 이토록 아름다운 스크롤의 미학

한국콘텐츠진흥원 | 2020-08-05 14:00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곳에서 기다려>, 
이토록 아름다운 스크롤의 미학 


<별똥이 떨어지는>의 페이지는 전통적인 페이지에서 이탈해 있다. 
그 공간은 페이지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커다란 칸에 가깝다.

글 오혁진


image.png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곳에서 
기다려> (글 그림 만물상 다음
웹툰 연재)
세로 스크롤의 미학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매체에 극대화해서 
연출된 그림은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한정된 세로 
공간이라는 지면에 갇혔다. 
세로 스크롤 연출에 자유로운 
웹툰은 출판 만화의 지면에서는 
또 다른 연출과 편집의 공력이 
더해져야 한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곳에서 기다려>(이하 <별똥별이 떨어지는>)에 관한 리뷰를 찾아보자. 만화 비평의 빈곤함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관련 글이 얼마 없으며 그나마 있다 하더라도 내용이 빈약하다. 특히 대다수 글은 동화적이라는 말만을 공허하게 반복한다. 동화적이라는 말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마법과 신화가 공존하는 세계. 별똥별이 떨어질 때 탄생한 마녀와 그런 그를 맞이하는 고양이의 이야기. 게다가 이 모든 풍경이 눈부신 색채와 아름다운 작화로 펼쳐질 때, 동화적이라고 말하지 않는 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동화적이라는 표현이 사실상 텅 빈 기호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가령 <별똥별이 떨어지는>과 전작 <양말 도깨비>는 모두 동화적이지만 같은 층위로 묶일 수 없는 풍부한 표정을 갖고 있다. 비평은 치밀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동화적 관용 어구만으로는 작품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동화적이라 말하려 한다면 작품의 세부가 어떻게 동화적 요소와 관계 하는지를 답해야 한다. 그래야만 작품을 섬세히 읽어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동화적 기호를 보다 풍부하게 생산할 수 있다.


동화적 기대 
만물상 작가의 작품은 동화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양말 도깨비>와 <별똥별>이 같은 층위의 작품이라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동화적 기호가 작동하는 방식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양말 도깨비>의 동화적 본질은 무엇일까?

첫째 그것은 칸이다. 누군가는 의아해할지 모른다. 칸과 동화가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이때 칸은 단순히 이미지를 재현하는 공간이 아니다. 때때로 <양말 도깨비>의 칸은 동화책을 펼칠 때 마주하는 그림을 둘러싼 틀이 되곤 한다. 이미지를 단정히 갈무리한 이 굵은 테두리에서 우린 동화적 기대를 투영한다. 동화책 볼 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자. 안정감을 주는 직사각형 문턱에서 동화적 세계를 황홀이 바라본다. 그 칸은 달리 말해 보는 이를 또 다른 별개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출입문이다.

둘째, 아르누보 양식이라 불리는 섬세하고도 고풍스러운 선과 문양이다. 꽃과 덩굴, 유기적 선과 기하학적 패턴은 <양말 도깨비>를 아름답게 수놓는다. 그리고 작가의 인장이라 할 수 있는 이 세부가 칸 주위를 에워쌀 때 칸은 출입문에 이어 고전 액자와 같은 장식적 틀이 된다. 여기서 아르누보 역시 어떤 동화적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양말 도깨비>에서 동화적 느낌을 받았다면 그건 결코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니다. 실제로 아르누보는 초창기 동화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령 월터 크레인을 포함한 3대 작가의 작품에선 예외 없이 아르누보의 유려한 장식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에도 많은 동화작가는 아르누보를 애용하고 있으며, 우리 역시 설사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동화의 원형적 도상으로 받아들인다.


페이지의 소멸
아르누보 양식은 <별똥별이 떨어지는>에 이르러 더욱 화려하게 전개된다. 특히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풀, 나무, 옷감, 머릿결과 같이 흐름을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래로 흘려보내 종국엔 기하학적 직선을 밀어내고 유기적인 선으로 칸을 만든다. 이때 흘러내리는 유기적 선을 주목하자. 선이 만들어낸 장식적 칸은 그 자체로 매혹적이지만 이 일련의 선과 흐름이 칸과 페이지의 경계를 흩뜨린다. 칸은 페이지가 되며 페이지는 다시 칸이 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칸과 페이지의 경계를 구분할 수가 없다. 물론 이러한 칸과 페이지의 형식은 <별똥별이 떨어지는>에서 처음 시도된 건 아니다. 오히려 웹툰의 일반적 연출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데도 <별똥이 떨어지는>을 주목하는 것은 웹툰의 미학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려는 작품의 힘 때문이다. <별똥이 떨어지는>의 페이지는 전통적인 페이지에서 이탈해 있다. 그 공간은 페이지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커다란 칸에 가깝다. 그래픽 노블의 아버지 윌 아이스너가 제창한 슈퍼-칸처럼 페이지의 개념을 소멸시키려 한다. 그 결과 <별똥별이 떨어지는>의 페이지는 칸이 되어 이미지를 재현하며 그리고 칸과 페이지의 관계는 칸 안의 칸이나 칸 위에 덧붙여진 칸으로 분화한다.


별똥별이 떨어진다
<별똥별이 떨어지는>의 이미지들은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렇게 하강하는 이미지들은 세로 스크롤과 상승작용하며 역동적인 운동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칸과 칸, 칸과 페이지 사이의 분절을 매끄럽게 봉합하며 무엇보다 세로 스크롤에서 가로 방향의 진행성을 구현한다. 웹툰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가로로 넓게 펼쳐져야 할 장면이 부자연스럽게 90도로 꺾여 수직적 공간에 놓일 때의 당혹스러움을 말이다. 그렇다면 <별똥별이 떨어지는>은 어떻게 웹툰의 구조적 한계를 넘어선 걸까? 만물상 작가는 수직 운동을 본격 시작하기에 앞서 수평의 이미지를 살짝 기울인다. 그것은 수직의 흐름에서 수평의 흐름을 이동시킬 일종의 시발점이다. 대각선 구도는 수평, 수직 모두 기울어져 있기에 양쪽 영역을 잇는 가교 구실을 한다. 구도를 기울이는 행위만으로도 놀랍게 세로 스크롤에서 수평의 파노라마를 경험하게 된다. 서사에 앞서 이미지가 떠오를 때, 다시 말해 이미지가 수직의 연속성에서 일탈하여 기어코 수평으로 뻗어 나갈 때 우리의 눈동자는 동요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별똥별이 떨어지는>의 운동은 계속해 나아간다. 가속도가 붙은 이미지는 칸의 경계선을 화면 밖으로 밀어내어 말 그대로 폭발한다. 이미지가 화면 전체를 완전히 채우면서 경계 너머로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이다. 엄격하게 규정된 칸을 통해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하는 <양말 도깨비>와 달리, 하강하는 운동에 동반된 이미지들은 더는 자신만의 공간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의 세계로 뻗어 나간다. 운동과 폭발의 총체적 울림으로 작품 자신이 별똥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이 ‘별똥별적 순간’이 우리의 망막에 나타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주인공 에픠의 모습, 눈 부신 빛을 발하며 부상하는 그 순간을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면, 그건 가시적 표층에서 벌이는 운동이 주제론적 체계와 분리할 수 없을 만큼 견고히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운동은 자체로 별똥별에 에픠의 존재를 상징한다. 동시에 신화에서 전해오는 태초의 이야기를 상기시키며 또한 마녀와 고양이의 간절한 염원을 형상화한다. 이렇게 이야기가 구체화한 운동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 별똥별이 떨어지는 저편에 어떤 세계와 이야기가 펼쳐질지를 진심으로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오혁진 | 만화 평론가. 현재 부산 ‘이미지 수집자’라는 모임에서 만화, 그림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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