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재벌과의 로맨스로도 '여성서사'를 그릴 수 있을까 -웹툰 <재벌과의 인터뷰>

조경숙 | 2020-08-02 20:11
지금까지 재벌과의 로맨스를 그린 콘텐츠는 많고 많았다. 90년대를 풍미했던 만화 <꽃보다 남자>가 대표적이고, 드라마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도 재벌인 남자 주인공과 평범하디 평범한 여성 주인공의 사랑을 그렸다. '신데렐라'로 불리는 이 여성 주인공들의 특징은 결코 가난에 굴하지 않고 부에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 돈이 가진 합리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매사 당당하고 엉뚱하며 때로 순진하기까지 한 이들 여성의 모습은 이른바 '재벌 남주'들의 호감을 사기 좋았다.

이런 여성 주인공들의 특징을 부각하기 위해서는 주인공과 정반대의 성정을 가진 여성 조연이 필요하다. 이때 여성 조연들은 여성 주인공과 정반대의 캐릭터를 지녀야 했다. 조연들은 몸이 곧고 아름답거나, 자신을 꾸밀 줄 알고, 부유함과 그에 따른 예법들에 익숙한 여성들로 등장한다. 부가 몸에 익고 이미 아름다운 여성들은 대개 자신을 잘 꾸미지도 못하고 예법도 모르는 여성 주인공을 깎아내리거나 멸시하는 역할을 맡아 '여적여'-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구도를 만들어왔다. 사실 재벌과의 로맨스 서사는 비단 작중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가 가지는 부의 불균형 때문에 성차별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주연과 조연이 가진 관계의 전형성 때문에 여성에 차별적인 시선이 재현되는 면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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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재벌과의 인터뷰> 썸네일 사진 (출처: 다음웹툰)

웹툰 <재벌과의 인터뷰>는 바로 이런 점에 착안해서, 로맨스 장르의 여성 차별적 시선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또 그 논리를 새롭게 뒤엎는 작품이다. <재벌과의 인터뷰>는 재벌과의 로맨스 즉 - 로맨스에 빠지는 작중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의 빈부격차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여성 캐릭터들의 관계성을 모두 새롭게 쓴다. 이 안에서 여성들은 누가 누구를 빛내기 위해 사용되지 않고, 충분히 서로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며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로맨스 서사에 필수인, 사랑의 장벽과 계략이 빠지는 건 아니다. <재벌과의 인터뷰>에서 '재벌남'을 맡은 '양서준'은 폭우로 인해 생명을 잃을 뻔한 여름휴가를 보낸 뒤, 이역만리 오지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여성 주인공 '지은'을 다시 만나려 한다. '지은'이 소설가임을 떠올리고 양서준은 소설 공모전을 개최하는데, 양서준의 비서인 '유능한'이 이를 저지하려 한다. '유능한'은 이름 그대로 능력이 출중한 여성 엘리트로, 차기 그룹사 회장 후보인 양서준의 옆을 지키며 본인의 커리어를 관리해왔는데 양서준이 연애에 빠지게 되면 회장 후계자에서 밀려날까 전전긍긍하며 '지은'과의 로맨스가 이루어지는 걸 방해하려 한다. 그러나 유비서의 행각에서 지은을 비하하거나 모멸적으로 대하는 태도는 전혀 없다. 애초에 유비서는 양서준에 대해 사적인 감정을 품은 게 아니고, 합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지은과 사적으로 날 세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유비서는 오히려 지은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으며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지은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재벌과의 인터뷰>는 주인공 지은을 그리는 방식부터 남다르지만, 여성 조연들과 지은이 관계 맺는 방식을 그리는 데에 있어 더 섬세함이 돋보인다. 이 만화는 여성서사 창작이 비단 여성 주인공 한 명만을 색다르게 그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 결국 여성 캐릭터 전부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 재배치는 단순히 관계가 일어나는 사건들만 변화해야 하는 것뿐 아니라, 그 여성 캐릭터들 한 명 한 명의 욕망부터 취미, 성격에서 외모까지 모두 변화시킬 때에라야 가능하다. 비중 적은 조연이라도 그저 손쉬운 클리셰로 사용하길 거부하고, 그들 하나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때 비로소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서사가 열린다. 심지어는 그게 '재벌과의 로맨스'이고 '신데렐라 스토리'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