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언택트 시대의 콘택트하기
한국만화영상진흥원
| 2020-10-14 14:00
언텍트 시대의
콘텍트하기
<스위트홈>과 <좀비딸>을 중심으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포럼 위원
서은영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일상을 바꾼 지 반년이 지났다. 학생들은 온라인 강의로 수업을 대체하고, 직장인들은 재택근무를 하며, 정부에서는 3밀(밀접/밀촉/밀집)을 피할 것을 권고한다. 사람들은 점차 불필요한 대면을 줄이고 일상에서의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내재화시켜 버렸다. 그러는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염려는 어느새 공포와 혐오로 바뀌었다. 특정 종교와 성소수자, 인종에 대한 혐오를 넘어 코로나 바이러스 완치자에 대한 공포도 짙어졌다. 최근에는 무증상자로 인한 감염이 보고되면서 특정 직업-택배원, 배달원 등–에대한 혐오마저 생겨났다.
사실 불안과 공포는 불가항력이라는 인간의 무기력이 만들어낸 허상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부(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를 혐오로 돌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오인한다. 바이러스에 대한 감염의 공포를 형상화한 대표적인 콘텐츠가 좀비물이다. 언데드한 신체가 이 세상을 잠식해가는 공포는 유한한 인간의 신체성을 보여주며, 대적할 방법이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게 한다. 백신이 없다면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전에 없애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좀비는 배척해야 할 대상일 뿐이며 공존할 수 없는 존재다.
후지타 나오야는 《좀비사회학》에서 생존을 위해 배제와 선별, 잘라내는 행위-신체 절단 등-를 정당화하는 좀비물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통치하는 장치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살아남는 것이 ‘정의’가 되어버린 시대에서 타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은 좀비로 형상화되어 우리 앞을 유동한다. 하지만 우리는 없애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이러스라는 것을 종종 망각한다.
언택트에 내몰린 우리의 일상의 불안과 공포를 혐오로 외재화시키는 현시점에서 좀비물은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우리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이에 두편의 작품을 살펴 보고자 한다. 김칸비・황영찬작가의 〈스위트홈〉과 이윤창작가의 〈좀비가되어버린나의딸〉(이하〈좀비딸〉)이다. 두 작품 모두 감염에 대한 내부의 공포를 연대와 공존을 통해 모색하고 있다. 감염의 고리를 끊기위해 언택트해야 하지만 오히려 콘택트를 통한 공존을 모색한 이들 작품은 감염의 시대에 인간의 윤리를 생각하게 한다. 참고로 〈스위트홈〉이 좀비물이라는데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내부로부터의 공포가 자신 스스로를 잠식(감염)시킨다는 의미에서 좀비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폐된 공간에서 연대의 공간으로 : <스위트홈>의 아파트
〈스위트홈〉의 공간은 철저히 고립되었다. 외부로의 차단과 단절. 그 공간은 다름 아닌 내가 사는 집이다. 집이라 함은 모름지기 가장 안정적이어야하고, 제목 그대로 ‘스위트홈’이어야 한다. 그런데 〈스위트홈〉의 집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며, 떠나야만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물들은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갇혀버렸다. 집밖을 나가는 것 조차 상상할 수 없다. 그곳을 나가는 순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다.
고립된 공간으로서의 아파트. 그러나 그것은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이곳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인간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콘크리트와 시멘트, 기술 공법에 의한 축조 등 아파트는 근대의 산물이다. 그리고 아파트 분양을 향한 들끓는 욕망들은 아파트를 자본의 산물이자 욕망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욕망이 실현된 그 공간은 내외부로부터 단절되었다. 아파트 주민들은 자신들의 공간을 경계로 외부인을 함부로 들이는 것을 거부하며, 아파트 외부인의 침입에 대한 공포는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본인들만이 거주하는 이 공간에서 스스로의 안락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처럼 아파트는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현대인의 면모를 포착한 공간이다.
주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외부인은 경비원이다. 경비원은 아파트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줘 안락과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타자로 존재할 뿐이다. 〈스위트홈〉 1화에서 이미 코피를 흘리는 장면을 통해 괴물화를 암시한 경비원은 “여기는 경비를 개똥으로 알아”라며 자신을 무시하는 아파트 주민들에 분노하며 결국 아파트를 고립시킨다. 아파트 주민들은 경비원을 철저히 타자로서 대했고, 타자에 대한 배척은 경비원을 좀비로 형상화했다.
게다가 아파트 주민들끼리 소통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외부인을 배척하듯 내부인 역시 배척하며 스스로를 닭장에 비유되는 작은 공간 안으로 유폐시킨다. 자신들의 공간에 침투할 것을 방어하듯 서로를 알려고 하지 않으며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다. ‘각자의 사정’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사정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포스트산업사회 이후 사회에서 겪는 피로도와 타인으로부터 오는 피곤함을 굳이 자신의 집이 있는 공간에서 조차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뒤섞여 있다. 이 아파트의 외부 공간은 철문을 닫으면 서로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모를 사적 공간이며, 서로 몰라도 공생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공간이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원치않으며, 단 한 평의 공간이라도 각자의 공간을 가지길 원한다. 철저히 개인화된 공간, 그것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공간이 아파트다.
각자의 공간을, 사유화된 공간을,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침범 받지 않을 권리를 추구하는 공간이 아파트지만, 역설적이게도 아파트는 잦은 층간 소음 공해로 아주 작은 것부터 침범당하는 공간이다. 화장실 물소리, 기침하는 소리, TV 보는 소리, 부부싸움 하는 소리, 섹스하는 소리 등 은밀한 사적 생활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아파트다.
그런데 〈스위트홈〉에서 아파트가 좀비로 인해 고립되었다. 스스로를 유폐시킨 그 공간에서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주민들은 콘택트(연대)를 선택한다. 그들은 스스로 아파트를 외부로부터 차단시키며 자신들을 보호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전에 살던 방식대로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곳에서는 서로 연대해야한다. 101호와 1001호가 만날 가능성은 지극히 낮지만, 감염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그들은 만나야만 한다. 이렇게 〈스위트홈〉의 아파트는 연대의 공간이 된다. 차현수를 비롯한 인물들은 결국 닭장과도 같은 자신의 방에서 나와 한 공간에 머물게 된다. 이곳은 각 방(호실)의 사연들이 공개되며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대면하게 하는 공간이고, 서로의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공간이다. 아파트는 이렇게 유폐된 공간에서 비로소 소통의 공간으로 확장되며, 사회화된다.
〈스위트홈〉은 타자(괴물)에 대한 배척이 내부의 욕망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스위트홈〉의 인물들은 자신만의 ‘스위트홈’을 되찾기 위해 괴물들을 물리치며 외부로 쫓아내고 이를 위해 내부에서 결속하기를 원하지만, 오히려 괴물화는 자신들의 내부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곧 ‘실체 없는 괴물’이라는 타자를 만든 것이 자신들의 내부의 욕망임을 깨닫는다. 행복에 대한 요구가 지나치면 우리 내부에 ‘스위트홈’이라는 욕망을 만들고,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전혀 스위트하지 않은, 욕망이 오히려 우리의 안전을 잠식시켜 버리는 공포를 도사리게 한다고 말이다. 〈스위트홈〉의괴 물(좀비)은 결국 우리 안에 있다.
혐오가 아닌 공존의 공간으로 : <좀비가 되어 버린 나의 딸>의 스위트홈
〈좀비딸〉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타자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함께 공존하며 살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정환과 그의 딸 수아는 부녀관계지만 수아가 좀비로 감염된 이후 인간-비인간(좀비)의 관계를 형성한다. 흔한 좀비 서사라면 아버지의 슬픔으로 끝냈을 내용이지만, 〈좀비딸〉은 좀비와의 공존을 택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환이 딸과의 공존을 택하는 순간 이 부녀는 좀비를 처단한다는 국가 권력에 맞선 개인들이 되어버리고, 그들이 살던 도시에서 더 이상 숨을 공간은 없다. 다행히 정환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내려가게 되지만, 이 공간이 없다면 그들이 맞닥뜨릴 것은 죽음뿐이다. 부녀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끊임없이 도망다니며 유령처럼 배회해야 하는 존재들로서 유동하는 신체들이다. 유동속에 비로소 고향에 정착함으로써 안정을되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고향은 말 그대로 ‘스위트홈’의 공간이 된다. 아니, 될 뻔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스위트홈’인줄 알았던 공간이 결말에서 또 다시 죽음의 공간이 됨으로써 그들의 유토피아는 실현되지 못한다. 은둔의 고수인 듯 보이는 정환의 어머니와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반려동물 애용이,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개그 코드가 부성애를 표방한 신파 코드와 만나 〈좀비딸〉을 감동 개그만화로 읽게 하지만, 이윤창 작가의 현실에 대한 통찰이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한다.
〈좀비딸〉의 수아는 인간을 오염시키며, 철저히 외면 혹은 배척해야 할 존재인 좀비다. 그러나 정환은 부성의 힘으로 좀비인 딸을 사회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 정환의 선택은 인상 깊다. 좀비를 인간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어느새 좀비로서의 수아를 인정하게 된다. 정환은 친구이자 동물병원 원장인 동배와 함께 좀비에 대해 연구하고 학습한다. 그들은 좀비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행동 패턴을 보이는지 등을 기록한다.
수아에게는 이 사회에서 함께 공존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는 여타의 좀비물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백신을 만드는것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반문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좀비세상/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에 이성을 잃은 ‘살아 있는 좀비들’일지도 모른다.
〈좀비딸〉의 작품 후반쯤 가게 되면 수아가 좀비라는 사실은 어느새 망각된다.
초반에 보였던 학교 친구들과의 거리감은 사라지고 인간 사회에 제법 적응한 좀비의 모습이 전혀 위화감 없이 읽힌다. 〈좀비딸〉은 좀비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상하리만치 수아가 좀비인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연화는 그녀를 정환의 딸로서만 대함으로써 좀비에 대한 거부감을 불식시켰고, 학교 친구들 역시 수아를 ‘사고로 인해 조금 특별한’ 친구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를 배척하지 않았다. 〈좀비딸〉의 좀비(수아)와 인간은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함으로써 이미 한 공간에서 공존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좀비딸〉을 읽는독자들에게 공존은 아직 힘든 일이었던 것 같다. 독자들은 정환의 눈물겨운 부성애에는 감동하면서도 그것을 현실에 이입하여 혐오의 언사들을 기술한다. 독자들이 보기에 정환은 위험천만한 바이러스 덩어리를 이리저리 옮기는 악의 축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것이 ‘픽션(fiction)’이기에 용인 가능한 것일 뿐, 만약‘ 리얼(real)’이었다면 극강의 이기적인 부성애를 가진 민폐일 뿐이라는 다소 현실적인 댓글들이 눈에 띤다.
작가는 〈좀비딸〉의 연재가 시작된 2018년 8월 22일에는 2020년의 코로나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테다. 〈좀비딸〉의 독자들은 정환의 부성애와 코로나 19의 상황을 엮어 읽으며 정환이 꿈꾸었던 공존의 세계로 선뜻 발을 들여놓지는 못한다. 수아의 친구들이 수아를 위해 청원을 할 정도로 전혀 위협적이지 않음을 증언했을지라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좀비딸〉의 89화에 주목하고 싶다. 수아가 좀비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간의 행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보인 행동이 어딘가 낯익기 때문이다. 정환의 집에 몹쓸 낙서를 남기거나 돌을 던지고 인터넷에서는 정환과 수아의 신상과 사진이 공개되었으며, 두 부녀를 향한 비난과 욕이 난무하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지냈던 이들은 두 부녀를 용서하길 청원하지만, 그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 대중은 공공의 대의를 명목 삼아 부녀를 처단하길 원한다. 89화 마지막에 “은봉리 주민 핑모씨의 인터뷰는 작품 〈좀비딸〉의 실제 댓글에서 발췌했다”는 작가의 코멘트 역시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마치 은봉리에 살고 계신 듯 생생한 댓글을 달아준 핑xx”의 댓글과 그 댓글에 공감하는 댓글들은 코로나 상황을 혐오로 감염시킨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좀비딸〉은 흔한 감동 개그만화가 아닌 코로나 시대의 슬픈 우화로 읽힌다.
무가지 <지금, 만화>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제공하는 계간만화, 웹툰비평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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