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일본 재난만화 읽기

한국만화영상진흥원 | 2020-10-21 14:00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일본 재난만화 읽기

지진, 쓰나미 그리고 좀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포럼 위원

김소원


지금 전 세계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재난을 경험하고 있다. 앞으로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적 경험은 사회적 변화 특히 대중문화에도 반영될  것이다. 자연재해는 인류와 늘 함께 해 왔고 종종 인간들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의 참상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생생하다. 거대한 쓰나미가 횝쓸고 간 자리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검은 격류에 낙엽처럼 떠내려가는 지붕, 연기가 피어오르는 대도시 빌딩 숲은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대지진은 자연재해로 시작되었지만, 쓰나미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를 덮치면서 대량의 방사능누출사고로 이어졌고 이후의 대응과 수습과정은 인재의 혐의를 벗을 수 없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많은 창작자가 나름의 방법과 시선으로 대지진을 이야기했고 ‘진재(震災) 문학’과 ‘원전(原發) 문학’이 비평용어로 정립된다. 일본은 지진이 매우 빈번한 지역인 만큼 지진을 소재로 한 다양한 문학작품이 존재하는데, 근대문학이 형성되던 1890년대에 이미 지진을 주제로 하는 문학작품들이 등장했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 1995년 한신 · 아와지(阪神·淡路) 대지진 이후에도 이들 재난을 둘러싼 다양한 문학작품이 창작되었다.
문학이 당시의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듯 만화 역시 독자들의 관심사와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재난을 소재로 하는 일본만화는 적지 않다. 목숨이 위태로운 극한의 상황은 박진감 있는 서사를 구성할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재난만화’는 지진, 화재, 화산 폭발, 외계인의 침공 혹은 정체불명 적들의 공격 등 각종 재난 상황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만화를 말한다. 만화가 재난을 그리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재난만화의 주인공들은 자연재해로 인한 조난을 겪어야하고 정체불명의 거대한 적과 목숨을 걸고 싸울 때도 있다. 때로는 적과 아군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 공황상태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 서사의 플롯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그 양상을 달리한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재난만화를 시대별로 살펴보고 그 특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전통적인 재난 서사의 시작

재난 상황을 그린 만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의 재난만화는 재난 서사의 전형적인 플롯을 보여준다. 불가항력의 대재난에 처한 주인공은 주변 인물들과 협력하고 때로는반목하며 재난 이전의 상태(혹은 공간)로 돌아가려고 사력을 다한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가 나오기도하고, 믿었던 사람에게서의 배신, 신뢰의 붕괴 등 재난 상황에 더해 인간관계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재난 이상의 지옥이 그려진다.

공포만화로 유명한 우메즈카즈오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한 《표류 교실》은이러한 재난 서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갑작스러운 지진 후 초등학교 건물 전체가 어디론가 옮겨진다. 모든 것이 황폐한 공간은 사실 문명이 붕괴한 이후의 지구이고 학교는 고스란히 미래의 어느 시간으로 옮겨간 것이다. 교사들 마저 모두 사망하고 아이들만 남겨진 세계에서 어린이들은 나름의 규칙을 만들고 생존 방법을 익혀 나간다.

작품 속에서 어린이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정체불명의 괴생명체도 굶주림도 아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이기심과 광기가 만들어낸 공포를 촘촘히 엮어 재난 서사의 한 플롯을 제시한다. 공포만화 장르에서 확고한 세계관을 구축한 작가답게 우메즈카즈오는 황폐한 미래로 날아간학교를 온갖 공포의 공간으로 만들어 낸다. 다소 과장된 사건과 사고가 끊임없이 쏟아지지만, 작가는 결국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 내면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이토 다카오가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한 《생존게임》은 지진과 쓰나미로 세상이 물바다가 된 가운데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남은 주인공 소년이 말 그대로 ‘살아남는’ 이야기를 그렸다. 주인공이 친구들과 함께 동굴탐사를 하던 중 갑작스러운 지진이 발생하고 혼자 동굴 밖으로 빠져나온 소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세상이었다.

전 세계를 강타한 거대 지진으로 대부분의 땅이 물에 잠겨 버렸고 동굴 밖 주변은 섬처럼 변해 있었다. 소년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동원해 생존한다. 내레이션은 다양한 ‘생존 기술’에 대해 설명하고 소년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강해진다. 이야기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사뭇 다르다. 전반부는 살아남은 소년과 그가 만난 몇몇 사람들의 생존과 죽음을 그린다면, 후반부는 주인공이 좀 더 큰 공동체를 접하고 그 안의 모순과 부조리를 바로잡는 이야기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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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류 교실》©우메즈 카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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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래곤 헤드》©모치즈키 미네타로


재난에서 살아남은 주인공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재난 서사가 확장된다. 이처럼 1970년대 재난만화가 주로 지진이 원인이 된 재난을 증폭시켜 그렸다면 이후의 재난만화는 지진뿐 아니라 보다 다양한 재난을 SF, 판타지, 로맨스 등 다른 장르와 결합해 더욱 넓은 스펙트럼을 갖게 된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한창이던 1980년대에는 재난을 소재로 한 장편만화는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양한 재난만화가 다시 등장했다.


재난만화의 변형과 확장

일본의 경제적 풍요와 대중문화의 발전은 만화에도 반영되어 1990년대 중반 만화시장의규모는 정점을 찍는다. 《주간 소년점프》, 《주간 소년 매거진》, 《주간 소년 선데이》 등 주요 만화잡지는 매주 수백 만 부 이상 발행되었고 만화 표현의 폭도 넓어졌다. 만화 장르는 다양해졌고 독자층도 두꺼워졌으며 만화는 일본을 대표하는 대중문화로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1990년대의 재난만화는 1970년대의 전통적인 재난 서사가 변형되고 보다 정교해지면서 재난의 원인과 파급력에 대한 설명이 더해진다.

이 무렵의 재난만화 중 주목할 작품은 모치즈키 미네타로가 《주간 영 매거진》에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연재한 《드래곤 헤드》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교토에 수학여행을 다녀오던 신칸센 안에서 눈을 뜨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열차가터널로 들어가던 순간 충격으로 기절했던 주인공이 깨어나자 눈에 보이는 것은 피투성이가 된 친구들과 선로 도중에 뒤틀려 멈춰 선 신칸센 열차이다. 신칸센에서 살아남은 것은 세 사람뿐.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터널 밖으로 나오지만, 터널 밖의 상황은 더욱 심각한 것이어서 세상은 후지산 폭발과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상태이다. 주인공은 가족이 있는 도쿄로 향하지만, 도쿄 역시 인간들의 공포가 만들어낸 아수라장일 뿐 희망의 답이 되질 못한다.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완결된 《표류 교실》이나 《생존게임》과 달리 《드래곤헤드》는어떤 구원의 메시지도 전하지 못한다. 작품이 연재를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 일본 사회를 커다란 충격에 빠지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1995년 1월의 한신 · 아와지 대지진과 같은 해 3월의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그것이다. 이 대지진은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본의 지진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망자는 전후 최대인 6,400여 명, 부상자는 43,000 명이 넘는 대참사였다. 대지진은 일본이 1970~80년대 고도성장을 통해 쌓아 올린 안전 강국의 신화가 무너지는 계기이기도 했다.

한신 · 아와지 대지진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인 3월 20일 도쿄에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난다. 퇴근 시간대 만원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하는 테러가 발생했고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13명이 숨지고 6,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오움 진리교라는 사이비 종교 단체가 치밀하게 준비해 벌인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였다. 불과 두 달여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대형 재난은 일본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드래곤 헤드》는 이러한 충격과 절망 그리고 세기말의 우울을 반영한다.

이후 재난물은 소녀만화에서도 등장한다. 타무라 유미의 《7SEEDS》(2001)는 인류가 대부분 사라진 세계를 그린다.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게 되자 각국의 수뇌는 인류의 멸망에 대비해 ‘7SEEDS’ 프로젝트를 만든다. 젊고 건강한 사람을 선발해 냉동 보존하고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으로 판단되었을 때 잠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프로젝트에 의해 냉동되었던 일부 인류만이 살아남은 인류 멸망 이후의 세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성이있다. 소녀만화 잡지에 연재되었고 작가 역시 소녀만화를 기반으로 활동한 작가답게 로맨스가 살짝 얹어지면서 재난만화의 장르 확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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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SEEDS》©타무라 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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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의 방과 후》©요시토미 아키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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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슨한 서바이벌》©세키구치 타로 


2000년대 이후 재난만화의 한 축을 좀비물이 담당하는 가운데 영화로 제작되는 등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의 하나가 하나자와 겐고의 《아이 앰 어 히어로》(2009)이다. 만화가로 데뷔했지만 데뷔작은 오래가지 않아 연재가 종료되고 지금은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매일같이 콘티를 작성해 편집부에 가지고 가는 만화가 히데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느 날 전국적으로 사람을 물어뜯는 ‘ZQN’이라 불리는 좀비떼들이 창궐한다. 이야기는 좀비물의 전형적인 서사를 보여준다. 속수무책으로 좀비가 되어버리는 사람들, 뒤늦게 자구책으로 좀비를 막아보려는사람들,그리고 재난 상황에서 전혀 힘이 되질 않는 국가가 등장한다. 주인공의 애인을 비롯해 주변인물들은 대부분 좀비가 되어버렸고 결국 히데오는 최후의 생존자가 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2000년대 후반이 되면 재난을 소재로 하는 일부 작품은 재난 상황을 어둡고 잔인하게만 그리진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요시토미 아키히토가 2009년부터 《챔피언RED》에 연재한 《지구의 방과후》이다. 이 만화는 전세계에 동시다발로 나타난 ‘팬텀’이라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에 의해 인류의 대부분이 사라진 지구를 그린다. 이 작품은 세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10대 4명의 일상을 그린 만화로 도시는 텅 비어버렸고 ‘팬텀’도 사라진 1년 후부터를 보여준다.

농사를 지어 채소를 재배하고 파티도 하며 평화롭게 흘러가는 일상은 ‘마치 영원히 계속되는 방과후’ 같은 것이며 ‘지구가 잠시 쉬는 것’과 같은 풍경이다. 이야기는 이들이 만나고 1년째 되는 날에서 시작된다. 만난 지 1년 된 날을 기념하는 파티를 하고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텅 빈 골목에서 직접 기른 채소와 달걀로 아침 식사를 하는 모습은 재난만화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평화로운 일상이다. 그림체마저 ‘재난’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목숨을 위협받지도 않고 곁에 있는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서사는재난만화로는 낯설지만 의외의 결말은 흥미롭다.

인류가 사라지고 극소수의 인간만 살아남는다는 설정은 재난물에서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사에서 생존자들은 대부분 모든 것이 멈춘 비문명 세계에서 식량과 물의 부족, 질병 등으로 고통받는다. 그러나 세키구치 타로가 2018년부터 《영 매거진 서드》에 연재하고 있는 《느슨한 서바이벌》은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아버지와 세 딸의 일상을 유쾌하게 그린다.
어느날 아침 주변의 모든 사람이 사라졌지만 딱 그뿐, 가족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도 없고 가족을 잃지도 않는다. 이 작품은 문명의 혜택도 누릴 수 있는 조용하고 천국 같은 서바이벌 상태를 그린다. 재난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겠지만 극한의 상황에서의 처참한 생존보다는 휴식 같은 생존과 마음 편한 재난도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인들이 수시로 경험해야 하는 지진은 없앨 수 없는 것이며 지혜롭게 대처하고 함께해야 하기에 재난 자체를공포보다는 낭만으로 치환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일본의 재난만화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됐다. 재난이 있고 그 재난의 원인, 극복의 방법이 제각각으로 폭넓은 재난만화는 일본의 만화시장 규모와 다양성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지진이라는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나는 지역적 특징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많은 이들이 경험했다. 피할 수 없다면 피해를 최소화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의 터득이 곧 만화에도 반영된 것이다.


정병호 | 《일본의 재난문학과 문화》의 저자
‘식민지 일본어 문학’과 ‘한일 재난문학’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재난문학 관련으로 논문 《메이지(明治)시대의 자연재해와 의연(義捐)행위로서의 재난문학》 공역서 《간토(関東)대지진과 작가들의 심상풍경》,《역락》 등이 있다.

최가형 | 《일본의 재난문학과 문화》의 저자
1990년대 일본사회에서 발생한 재난들과 관련 재난서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재난문학 관련 된 논문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일본진재문학(震災文?)에서의 교토 표상》, 공역서 《간토(関東)대지진과 작가들의 심상풍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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