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팬데믹 시대, 재난만화로 보는 학교라는 세상
한국만화영상진흥원
| 2020-12-16 14:00
팬데믹 시대, 재난만화로 보는
학교라는 세상
〈지금 우리 학교는〉 + 〈유쾌한 왕따〉
만화평론가
이재민
흔히 우리는 만화를 상상력과 연결시킨다. 만화는 상상력을 통해 우리를 다른 세계를 체험하게 해주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상상력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 다른 곳으로 변화한다. 때문에 상상력은 언제나 도래하지 않을 미래, 또는 지나간 시간에 멈춰버린 과거를 대상으로만 작동할 수 있다. 만화를 비롯한 예술의 상상력은 언제나 현재를 과거에 박제하는 작업이거나, 과거의 일을 되살리는 부활 의식, 미래의 일을 그려보는 꿈으로 작동한다.
현재에 벌어지지 않을 일을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안전하게’, ‘거리를 두고’ 상황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상력은 우리가 그려보지 못했던 세상에도 데려갈 수 있다. 심지어 오지 않을 줄 알았지만 우리가 채 준비하기도 전에 도래한 미래를 그릴 수 있게 한다.
재난만화를 포함한 재난 장르물은 현재를 주로 다룬다. 결코 도래하지 않을, 물리적으로 안전하지만 결코 안락하지는 않은 현실을 상상 속의 재난으로 뒤집어 독자에게 쾌감을 안기고, 현실의 불합리와 부정의가, 그리고 현실의 제약이 무너지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0년 지금, 우리는 그동안 상상해보지 못했던 재난의 상황에 직면했다.
〈지금 우리 학교는〉 ©주동근
〈유쾌한 왕따〉 ©김숭늉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때, 학교는 안전한 공간이다. 적어도 밖에서 보기엔 그렇다. 학교는 아직 법적으로 시민이 되지 못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공간이며,
공공부문에서 아이들을 지키고 사회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바로 이 지점이 학교가 재난만화의 주요 소재가 되는 이유다. 학교는 모두가 경험했기 때문에 별
도의 세계관을 설명할 필요가 없고, 제도권 안에 존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재난으로 기능을 상실한 상태의 혼란과 관계 역전을 그리기 좋은 무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학교는 ‘미래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어떤방식으로든 현재를 미래에 저당 잡힌 공간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학교는 이중적인 공간이다. 제도권 유지를 위해 필요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 과정인 교육에는 실패한 공간이다.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질서와
학생으로 대표되는 자유로움이 대결하는 공간이 학교다. 대학 입시라는 불투명한 미래에 올인하기를 요구받는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은 것은 당연히 우연이 아니다. 특히 재난물에서 학교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다수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학교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리기에 적합한 무대이기도 하다.
2011년 연재를 마친 주동근 작가의 〈지금 우리 학교는〉, 그리고 2016년 완결한 〈유쾌한 왕따〉는 이런 클리셰를 다루지 않았다. 이는 웹툰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 두 작품이 갈등구조 내에 입시나 성적이라는 키워드를 집어넣지 않고도 재난 상황을 다루는 시선은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바이러스 창궐과 대지진이라는 파멸 상황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정반대로 학교라는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입시라는 ‘정상성’
:〈지금 우리 학교는〉
먼저 〈지금 우리 학교는〉의 무대인 효산고는 원인 모를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완전히 붕괴된 후 생존만이 남은 효산시를 배경으로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품에서 학교는 아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해 무너진 질서 안에서 생존을 위해 단결하거나, 또는 반목하면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바이러스에 감염된 일종의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는 내용을 그린다. 작품 말미에 그려진 ‘재난 이전으로의 복귀’는 살아남은 주인공들이 고3이 된 것으로 표현된다. 현실에서는 누군가에겐 끔찍한 재난이나 다름없었을 입시지만, 상상속의 재난을 겪은 아이들이 무사히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는 점이 흥미롭다.

학교라는 공간을 흥미롭게 표현한 것과는 별개로, 작품 속에 표현되는 수위 높은 폭력과 잔인한 사건들을 겪으며 트라우마를 입은 아이들이 다시 입시로 돌아가야 하는 아이러니가 남는다. 이 아이러니는 결국 이 작품이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정상성이 외부의 요인으로 붕괴되었다가 다시 구축되는 상황을 그리며, 입시를 통해 대학에 간다는 정상성을 뒤엎기는커녕 최소한 흔들지도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우리 학교는〉의 사건은 ‘모두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재난이 아니라 소수의 인물만이 겪은 해프닝에 그치게 된다. 학교는 정상성과 안온한 일상을 뜻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선생들을 비롯한 학교 안의 기성새대 모두가 사망하거나 좀비로 변해버리는데, 살아남은 아이들은 특성이 다양하지만, 선생들은 다양성과 상관없이 모두 죽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학교가 가진 문제를 학교라는 공간 자체의 문제보다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문제로, 나아가 2009년 즈음 불붙기 시작한 이른바 ‘88만원 세대’ 등 세대론이 불거져 나오던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학교 안의 세대를 조망하는 시선이 흥미롭다. 바로 이런 시선이 완결 후 9년만에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제작이 확정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학교 공간의 이중성
: 〈유쾌한 왕따〉
이보다 5년 정도 뒤의 작품인 〈유쾌한 왕따〉는 보다 과격한 방법을 택한다. 학교 자체를 무너뜨려 아이들을 지하에 가둬버린다. 1부가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학교 밖 상황을 알지 못하고, 아이들의 시선으로 학교 지하-평소라면 미지의 공간-에 갇힌 상태를 그려낸다. 작품 속에서 학교는 왕따 가해자와 피해자가 지배-피지배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곳으로, 선생님의 간섭이나 피해 구제가 없는 곳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지진으로 지하실에 갇힌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재난으로 인해 새로운 질서, 즉 새로운 지배계급을 만들어낸다. 기존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역전되면서 빚어내는 새로운 갈등은 무너진 지하실 속 아이들이 구출될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면서부터 본격화된다. 결국 ‘나아질 것이 없는’ 상황이야말로 인간이 지배-피지배라는 불합리한 관계를 받아들이는 결정적 원인이며, 그 때문에 벌어지는 불합리는 이후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

〈유쾌한 왕따〉에서 재난은 학교를 고립된 독립공간으로 만들어 아직 다 성장하지 못한 중학생들을 격리해 안전을 확보함과 동시에 내부의 지옥의 구도를 바꿔놓는 이중성을 갖는다. 2부에서 겨우 탈출한 주인공은 더 지옥 같은 현실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학교가 보여주는 이중성은 현실의 학교가 하고 있는 역할과 일치한다. 다만, ‘정상’ 상황에서의 지배-피지배(또는 가해-피해) 구도가 뒤바뀐 상황일 뿐이다.
학교는 안전한 공간이어야 하고, 차별과 배제가 없는 평등한 공간이어야 한다. 김숭늉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학교가 배제하고, 위험하게 방치한 아이들의 모습을 지적한다. 학교라는 공간이 안전하게 작동하는 것은 결국 ‘정상성’을 획득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느냐고 일갈한다.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야 할 학교의 존재가 위험을 방치하고 아이들을 나가지 못하게 하는 철창으로 작동할 때, 탈출이 불가능한 지옥이 된 학교와 재난 이후 붕괴된 학교를 그리면서 학교의 존재와 학교의 부재가 ‘다르지 않음’을 역설한다. 현재의 지옥을 타개할 방법도, 그 이후를 꿈 꿀 기력도 없는 사람들은 결국 멸망을 바란다.
팬데믹 시대의
학교란?
이렇게 상상력은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여러 시선을 가상의 공간 속에서 구현해볼 수 있게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끔찍한 재난은 결국 가상의 것이고, 우리는 분석을 통해 현실에서 보이지 않게 숨겨진 어두운 부분을 찾아내곤 한다.
구역질나고 끔찍한 부분이지만 예술을 통해 승화된 작품 속 이야기를 통해 만나볼 수 있는 것이 상상력의 장점이다. 비가시화된 영역을 가시범위에 들여놓고, 비가시화된 사람들이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는 상상을 통해 우리는재미를 느낀다.
하지만 현실세계에 재난이 닥쳤다. 재난은 더 이상 안온한 일상에서 상상하는 즐거움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영역으로 발을 성큼 들이밀었다. 코로나19로 인해 학교는 폐쇄됐고,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서 온라인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그러자 학교에 모두가 모여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컴퓨터 등을 통해 온라인 접속이 어려운 빈곤학생, 장애학생과 이걸 선생님 대신 집에서 지도해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차별 없이 학습 받을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선생님들의 일방적인 희생과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무책임한 태도로 질책을 받기도 했다.
〈지금 우리 학교는〉과 〈유쾌한 왕따〉는 각자의 방식으로 학교의 역할을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학교는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 되기도 하며, 결국 ‘정상’으로 돌아오는 마침표 같은 역할을 한다. 〈유쾌한 왕따〉에서는 학교라는 공간의 이중성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꼬집는다. 두 작품 모두 학교라는 공간이 최종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지점을 이야기하고, 그 방법에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상상력의 바탕이 되는 현실에서 여기에 닿을 수 있을까? 코로나19라는 재난이 드러낸, 그동안 우리가 숨겨왔던 약자들을 방치하지 않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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